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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미스코리아 머리로 불리는 사자머리 스타일을 세계 전역에 유행시킨 이 가 바로 70년대 미국 여배우 파라 포셋이란 사실을 아시나요?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1970년대 텔레비전 스타로 인기가 높았던 파라포셋이 얼마나 아름답고 인기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세상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파라포셋의 유년기

 

파라포셋은 1947년 2월 2일 미국 텍사스주의 코퍼스크리스티라는 해안도시에서 석유 관련일을 하는 아버지와 가정 주부인 엄마 사이에 두 자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파라포셋의 풀네임은 메리 파라 레니 포셋이며 배우가 되면서 파라 포셋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예쁘게 생긴 외모로 주목을 받아왔는데요.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봐서 그녀는 사람들이 제발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내내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기 폭발이었고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 미생물학과에 입학하였지만 미술 구체적으로는 조각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조각가로서 그녀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데뷔 스토리

 

또한 1학년 때 캠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명의 여학생에 선정되었는데 신입생이 선정된 사례는 처음이었으며 이후로 그녀의 사진은 할리우드의 여러 에이전시로 보내졌습니다. 그후로 헐리우드의 에이전트에서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내왔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학업을 마치길 원했기에 2년 동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여름 그녀의 부모는 할리우드로 여행하는 셈 치고 다녀오는 것은 허락을 하였고 파라포셋도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대학 3학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할리우드에 도착한 그녀는 더는 졸업도, 텍사스에 갈 일이 없을 정도로 일거리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결혼과 헤어스타일

 

 

그녀를 사로잡은 남자는 드라마 시리즈 육백만 불의 사나이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리 메이저스였습니다. 1939년생의 리 메이저스와 파라포셋은 5년 동안 연애를 하다 1973년에 결혼하였는데요. 당시 미국에서 가장 환상적으로 잘 어울리고 유명한 스타 커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파라포셋보다 더 잘 나가던 리 메이저스는 그녀가 일보다는 가정 주부로 있길 원했기에 순종적인 성향의 파라포셋은 자신의 일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제시간에 들어가 남편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일을 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1976년 파라포셋은 미녀 삼총사란 티브이 시리즈를 찍으면서 초특급 스타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이 수백만 여성들의 관심을 끌면서 유행하였는데요. 한국에서는 일명 미스코리아 머리로 불리죠.

 

정확한 헤어 종류는 롱 레이어드 섀기 커트(long layered shag cut)로 깃털처럼 북실북실하고 끝 부분을 말아서 바깥으로 날리게 하는 스타일로 일명 플립 아웃 헤어스타일로 불립니다. 

파라포셋은 미녀삼총사 출연 이후로 77년까지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최고 스타로 군림했습니다. 각종 매체와 선물 용품은 그녀 사진 일색이었고요. 그중에서 빨간색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자그마치 1200만 장이 팔릴 정도로 70년대 최고 섹스심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좋은 일만 생기진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급상승하는 직업을 돌보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너무 많이 받았고 결국 두 사람 간의 관계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고요.

 

두 번째 사랑

 

그런 와중에 공허한 빈자리를 리 메이저스의 오랜 친구 라이언 오닐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에 개봉한 영화 러브스토리로 스타가 된 오닐은 지고지순한 캐릭터와는 달리 엄청난 바람둥이로 유명하였는데요. 파라포셋과는 친한 친구로 잘 지냈으며 파라포셋은 오닐의 딸을 돌봐주기도 하는 등 잘 지내다 사랑에 빠진 모양입니다.

 

 

1979년 파라포셋과 리 메이저스는 헤어졌고 공식적인 이혼은 1982년에 했습니다.  파라포셋은 라이언 오닐과 친구였다가 연인이었다가 오락가락한 관계 속에서 라이언 오닐의 바람기를 의심해 결혼은 하지 않았고요. 그런 사이 라이언 오닐은 두 번 더 결혼하였습니다. 파라포셋과 라이언 오닐 사이에는 1985년 아들 레드몬드가 태어났음에도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였으며 이들은 17년간 같이 살다가 1997년에 헤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이언 오닐과 파라포셋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감동하였다고 하는데요. 혹자들은 라이언 오닐의 완벽한 연기였을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라이언 오닐의 딸 테이텀 오닐은 아카데미상을 10살 때 수상한 최연소 배우였는데요. 라이언 오닐은 이런 딸을 시기할 정도로 성격이 기이하였는데요. 바람둥이로 유명한 그는 훗날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치근덕거렸다고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말하길 아버지 오닐은 파라포셋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다고 하였습니다. 

 

항문암에 걸린 파라포셋

 

파라포셋이 라이언 오닐을 믿지 못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파라포셋은 50세에 플레이보이지 표지에 실릴 정도로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2006년에 다소 희귀한 항문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주로 성접촉으로 인하여 생기는 암으로 인해 파라포셋은 절망하고 억울해했습니다. 그녀의 언니도 2001년에 폐암으로 사망했기에 파라포셋은 자신이 유방암이나 다른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항문암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범위였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치료에 전념하였고 2007년 2월 2일 그녀의 60번째 생일에 암이 완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암을 이긴 그녀는 불확실성과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소회를 밝혔고 자신의 완치가 불행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 후 포셋의 일상적인 의사 방문에서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허용되지 않는 대체 치료를 추구하기 위해 독일로 날아갔습니다. 병에 맞서 싸우면서 그녀는 자신의 치료 과정을 다큐로 찍으면서 많은 사람과 고통과 슬픔을 공유했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 그녀의 91세 된 아버지는 그녀를 보기 위해 날아와 딸과 작별 인사를 하였고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하나뿐인 아들이 헤로인 소지 혐의로 수감되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교도소 점프 슈트를 입고 수갑을 벗은 채 경비원의 보호 아래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엄마를 불렀지만 이미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파라 포셋은  2009년 6월 25일 62세의 나이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이 워낙 파장이 컸기에 그녀의 죽음이 조용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입니다. 

포셋이 암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그녀가 죽을 때까지 라이언오닐은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이고요. 그녀의 사후 그녀의 무덤 앞에 프러포즈를 한 것도 일종의 쇼를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그의 행동에 진정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조의를 표하러 온 그의 친딸 테이텀 오닐을 못 알아보고 집적댔다고 하니 말 다했죠.

 파라포셋은 약 6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유산 대부분을 그의 유일한 아들에게 남겼습니다. 자신의 모교나 암센터 등에도 일부 기증하였지만 그녀 곁을 지킨 라이언 오닐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죽음 뒤 2012년에는 레드몬드는 아버지 라이언 오닐과 마약 소지혐의로 나란히 체포되어 약물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파라포셋의 아들 레드몬드는 자신의 문제는 마약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심리적 트라우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원인을 부모 특히 아버지 탓으로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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