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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파퀸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패션을 전공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음악의 어머니 헨델처럼 패션계에선 의상의 어머니로 불리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파퀸스럽다라는 찬사를 만든  잔느 파퀸

 

 

 잔느 파퀸은 1891년 무렵부터 1920년까지 근 30년간 활동하면서 최고의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잔느 자체가 매력있고 뛰어난 언변을 동반한 사교술 위에 사업 수완도 뛰어난 잔느 파퀸은 당시 고도의 세련된 여성에겐 파퀴네스크 즉, 파퀸스럽다는 찬사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잔느 파퀸의 디자인 스타일

 

 

잔느가 한창 잘나갔을 때는 27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면서 주로 여배우 및 사교계 셀럽을 상대로 의상을 디자인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시크하지만 실용적이고 대담하지만 과하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소 이국적이면서 기기묘묘한 스타일에 속한 폴 푸아레와는 심심찮게 신경전을 벌였다.

잔느 파퀸의 어린 시절

잔느 파퀸은 1869년 6월 23일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의사였다. 잔느는 10대 때 이웃의 양장공 견습생으로 일하다 매리 루프 밑에서 일하면서 현대 용어로 수석 디자이너 직위까지 오른다. 

1891년 잔느는 사업가 이사도르 파킨과 결혼하는데 그는 1840년대에 남성복 상점을 소유하면서 의복 관련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이 남편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사업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잔느도 시댁 집안의 후원으로 기존의 의류 사업을 파킨으로 개명하면서 활발한 의류 사업을 벌이게 된다. 특히 파리에서 가장 핫 한 상점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잔느가 사업을 확장하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그렇게 부유한 남편과 함께 그녀의 재능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파퀸의 디자인 철학

파퀸의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인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스타일은 과감하고 극단적인 패션을 주도하는 당시 남성 디자이너와 대조되었다. 그녀는 운전을 하거나 골프를 치면서도 같은 옷을 입고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데 전혀 거리낌없는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실용적인 패션을 추구했다. 파퀸의 사업이 확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영국 런던의 도버가 39번지에도 문을 열었다. 훗날 이 건물은 전쟁 기간 동안 파괴당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만 1950년대에 모회사와 함께 문을 닫으면서 파퀸의 시대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전멸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너무 잘나가 성공에 불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파퀸의 스타일이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비판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란제리, 모피, 액세서리까지 확장하면서 다른 디자이너 브랜드보다 값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러한 사업 패턴이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말이다. 

남편의 사후 일에만 전념한 잔느 파퀸

이렇게 한창 잘나가던 부부 사업가였지만 1907년 남편이 4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잔느는 38세의 미망인이 되었다. 잔느는 죽은 남편을 위해 동상까지 제작했다. 남편의 사후 파퀸은 더욱 일에 전념했는데 사업가라기보다는 엄연한 예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특히 당시 트렌드 중심에 있던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상업적로 접목하여 성공한 아티스트로 평가 받는다. 

낭만적이고 여성스러운 잔느 파퀸 스타일 드레스

 

 

18세기 이브닝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화려하면서 파스텔 색감을 주조로한 낭만적이고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시작했던 잔느 파퀸은 점차 검정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당시 검정은 장례식 때나 입는 색으로 여겼지만 파퀸은 검정을 재해석하여 풍부하고 밝은 느낌을 살려주는 데 일조하는 완벽한 배경 컬러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유난히 오렌지 컬러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보통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먼저 구상한 다음 컬러를 지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파퀸은 당시에 컬러를 정해놓고 의상을 디자인할 정도로 컬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당시 또 한 명의 인기있던 디자이너 폴 푸아레와 티격태격한 와중이었는지 그래서 그리 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파퀸은 폴 푸아레가 제시한 원초적으로 이국적인 호블 스커트를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해서 판매에 또 다른 유행을 이끌었다. 1911년 폴 푸아레가 아라비안 나이트 스타일 하렘 팬츠를 처음 선보였을 때 파퀸은 미학적이지 않다며 비판했고 호블 스커트 역시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신의 스타일로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푸아레 입장에서는 결국 자기 스타일을 따라한 거면서 딴지를 걸었다고 화가 날 법도 할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파퀸이 만든 탱고 드레스

무엇보다 파퀸이 디자인 의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아이템은 1913년에 만든 탱고 드레스이다. 파퀸이 만든 탱고 드레스는 층위를 두어 실용과 미학을 겸비한 절정의 의상이었는데,  이를 깊이 들어가면 미국 춤의 역사까지 거론해야해서 중략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는 명품백이 아닌 댄스로 퀄리티를 규정하면서 미묘한 대결을 벌이던 시기였기에 재즈에 적합한 의상, 탱고에 적합한 의상 등이 나오는 것이 놀랄 것도 없이 대중 패션의 일환으로 간주하면 된다.

잔느 파퀸의 뛰어난 감각과 창조력 그리고 추진력은 프랑스 훈장 중 가장 명예롭다는 레지옹 도뇌르 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잔느 파퀸은 훈장까지 받은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패션의 어머니를 넘어 패션의 여황제라 칭해도 될 것같다.

1907년부터 국제 패션 박람회 등에서 맹위를 떨친 잔느 파퀸은 본래 14세기 이후 왕실에 선보이기 위한 마네킹을 전시회에 활용해 크게 히트했는데, 이후 세계 각종 상점에는 마네킹이 맵시를 뽐내며 진열된 모습이 놀랄 일도 아닌 당연한 일처럼 된 것도 그녀 몫이 크지 않을까 한다. 이에 관해서 마네킹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 것 같기에 일단 패스.

크리에이터 감각이 뛰어난 파퀸의 최후

암튼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아티스트라기보다 크리에이터라고 해도 될 만큼 창조적이고 마케팅 실력이 뛰어났는데, 뭐랄까 장인 정신에 의거하기보다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활용한 덕분에 소위 짝퉁 스타일이 만연하게 되는 부작용도 낳았다. 디자인 유출도 수월하다보니 각종 소송과 분쟁하느라 피곤한 나날이었다. 소위 해적판과 싸워 승소는 했다. 그리고 파퀸은 1920년 가장 명망이 높을 때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은퇴하였다. 그녀의 나이 겨우 51세였다. 그리고 1936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 얘기는 없는 걸 보니 무자식이었나 봄.

디올이나 샤넬 등 창조주 사후에도 브랜드는 명성을 이어갔지만 프랑스 패션을 이끈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디자이너의 후발대는 신선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퇴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1950년대 중반 완강하게 재치와 감각을 돋보이며 활약했던 

  클래버리도 있었지만 오히려 미국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1956년 파퀸 가문은 문을 닫았다. 그런거 보면 젊다고 감각이 남다른 것이 아니란 걸 패션, 정치, 경제 전반적인 분야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많은데도 역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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