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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모핏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이자 패션모델이었습니다. 독특한 외모와 매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그녀는 놀라운 혁신가이기도 했습니다.

 


스타일 아이콘 페기 모핏

 

페기 모핏은 시나리오 작가 잭 모핏의 딸로 1940년 5월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말버러 여학교에 입학하여 방과 후 베벌리 힐스의 잭스 부티크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으로 2년간 이주해 살았고 할리우드로 돌아와  1955년 배우로 경력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여러 편의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서 찍었고 1959년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베틀 플레임 이후 1960년에 포토그래퍼 윌리엄 크랙스톤과 만나 결혼했습니다. 윌리엄은 당대 역동적인 패션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루디 게른라이히의 옷을 입은 페기 모핏을 찍어서 그녀와 함께 주목받게 되는데요. 1964년에 상의를 탈의한 수영복 촬영을 하면서 악명 높게 패션계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독특한 마인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녀는 나체와 패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대범한 포즈와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게 됩니다. 그렇게 1964년 상의를 탈의한 최초의 나체 모델이 되었고 플라스틱 소재 등 독특한 의상을 입고 그 시대 트렌드를 선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상의를 탈의한 촬영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녀는 청교도적인 메이플라워의 후손이었기에 지극히 보수적인 환경에서 정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디자이너 루디를 위해 무료로 기꺼이 도와주게 되었고 그녀의 모습은 발표된 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루디게른라이히의 독특한 의상을 더 독특한 페기 모핏이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소화하여 여성들이 옷을 입는 방식을 바꿨고 페기는 여성들이 지향하는 외모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독특한 비달 사순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가부키 같은 메이크업 등 그녀는 걸어 다니는 예술 그 자체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녀는 패션 화보 등에서 포즈를 취할 때 이색적인, 그러면서 역동적인 포즈로 유명했는데요. 페기 모핏은 항상 댄서를 꿈 꾸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체형 혹은 몸의 형태보다는 인간의 포즈, 특별한 움직임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그녀가 취하는 포즈는 참으로 남달라 보입니다. 

 

 


 

춤에 더 관심이 많던 페기 모핏

 

 

그래서인지 그녀가 춤을 공부하는 것은 그녀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그녀의 연기와 패션 포즈에 큰 반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배웠던 당대 할리우드 최고 스타들의 대표적인 춤선생이기도 한 마사 그레이엄에 대한 불만도 노골적으로 표현하여 적잖은 충격을 줬는데요. 마사 그레이엄은 명성에 비해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전혀 유명하지 않은 다른 선생들이 더 잘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마사 그레이엄은 춤은 잘 추지만 가르치는 실력은 부족하고 그녀 주변의 다른 선생들이 마사 그레이엄으로 빙의해서 친밀하게 잘 가르쳤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건강하지만 쓸쓸한 노년

 

일찍부터 배우가 되고 싶어하고 춤에도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지만 그녀가 가장 성공한 분야는 패션모델이었습니다. 70세가 넘은 모핏은 현재 업계와는 무관하게 지내고 있지만 현재의 패션 업계에 관한 일침도 잊지 않았습니다. 현재 패션계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패션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개성이 사라지고 평범한 스타일을 그녀 입장에서는 보기가 싫었나 봅니다. 

그리고 자칭 책 중독자인 페기모핏은 수십 톤의 책을 가지고 있으며 사진에도 매우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소설은 읽지 않고 주로 시각적인 책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패션 잡지도 좋아했지만 광고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안 뒤론 더이상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관절염이나 당뇨병이 없이 살고 있으며 고양이를 키우며 2008년에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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